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외교협정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1883년 5월 조선의 수도 한성(서울) 정동에 미국공사관이 개설되고, 조선주재 미국 초대 공사로 루셔스 푸트 (Lucius H. Foote) 가 부임하였습니다. 이로써 시작된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현재까지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1883년
주조선미국공사관 개설, 푸트 공사 부임 / 보빙사 파견
조선은 미국의 공사관 개설(1883)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民泳翊)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고, 보빙사는 이 해 9월 미국 제 21대 대통령 아서(Chester A. Arthur)를 예방(禮訪)하였습니다. 조선은 이들을 통해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미국인 군사 교관, 광산 기술자, 학교 교사들을 초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7년
초대 주미 특명전권공사로 박정양 임명
초대 주미 특명전권공사 박정양
주미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고 기록한 《승정원 일기》기사 (1887. 8. 18.)
1888년
주미국공사관 개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 공사 등 공사관원 일행이 백악관을 방문해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습니다. 마침 이때 모습이 삽화와 함께 미국의 언론매체에 소개되었습니다. 오른쪽 첫 번째 손에 국서가 담긴 함을 든 인물의 뒤편에 선 인물이 박정양(朴定陽) 공사로 추정됩니다. 삽화 속 두 명의 서양인은 조선왕조가 임명한 미국인 외교관 에버렛 프레이저(Everett Frazer 厚禮節, 뉴욕영사)와 호러스 N. 알렌(Horace N. Allen 安連, 참찬관)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 하퍼스위클리(Harper’s Weekly, Vol. 32, No. 1623)
1889년
주미국공사관 이전
박정양 공사와 공사관원 일행은 미국 도착(1888.1.1.) 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1888.1.17)하고 백악관 부근 피서옥(Fisher House, 皮瑞屋) 에 첫번째 공사관 사무소를 개설(1888.1.19.)하였습니다. 이듬해 현재의 공사관 건물로 이전해 공사관 사무소를 새롭게 개설(1889.2.13.)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1889년 5월 8일, 이전 약 3개월 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속에 잘 나타납니다. 사진의 하단에는 워싱턴의 한자식 표기인 ‘화성돈(華盛頓)’을 표기해 ‘재미국화성돈조선공사관지도(在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之圖)’라고 적었습니다.또 사진 왼편 상단에는 ‘개국ᄉᆞᄇᆡᆨ구십팔년ᄉᆞ월초구일’(양력 1889.5.8.)로 표기해 촬영일을 적었습니다. 건물 입구에 갓을 쓴 공관원들과 미국인 호러스 N. 알렌의 모습도 보입니다. 특히 건물 옥상에 ‘국긔’라고 표기했는데, 국기게양대와 태극기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널리 강조하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소장처 : 연세대학교박물관
1893년
시카고박람회 / 주미공사관 여권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 설치된 조선전시관 (Corean Exhibition)
1893년 1월, 주미공사관 서기관에 부임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발행한 장봉환 여권 (1893.1.24.)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백악관 연회 배치도 (《美槎日錄》, 1897.1.21.)
제 8대 서광범 공사의 사망을 보도한 뉴욕트리뷴 기사 (1897.10.3.)
1898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화재 발생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화재가 발생한 사실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기사 (1898.4.9.)
1900년
공사관 수리견적서
공사관 수리를 위해 현지 업체 (A. J. Fisher & Co.)로부터 견적을 받은 내역서 〈주미공관중수명세서〉 (《駐美來去案》 四, 〈駐美公館重修明細書〉, 1900. 4. 13.)
1901년
주미공관 물품기
공사관 각 방에 배치된 물품의 목록을 정리한 문서인 〈주미공관물품기〉 (《駐美來去案》 五, 〈駐美公館物品記〉, 1901.8.)
1910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강제 매각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었을 당시 소유권 양도 서류 (1910. 6. 29.)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일본에 의해 매각되었음을 보도한 워싱턴타임즈 기사 (1910. 9. 3.)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일본에 의해 매각되었음을 보도한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기사 (1910. 9. 3.)
1913년
일제 강점기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도 함께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미주한인사회에서 빼앗긴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은 오히려 독립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미주한인들이 공사관 건물을 ‘반드시 주권을 회복하고, 다시 찾아야할 국권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에서는 독립의 강렬한 염원만큼이나 커다란 태극기를 그려 넣은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엽서를 제작해 우편으로 주고받으며 독립의 굳은 결의를 다졌습니다. 소장처 : 독립기념관
2012년
다시 찾은 공사관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이후 대한제국 시대의 해외 공사관 중 유일하게 내외부 원형을 모두 간직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을 되찾으려는 대한민국 정부와 재미 한인 사회, 언론 등 각계의 다양한 노력과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재미 한인 사회와 사회 각계의 관심 속에 2012년 10월 문화유산국민신탁을 통하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매입하였습니다.
2018년
공사관 개관
2018년 5월 22일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개관을 하였습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한국과 미국의 역사가 함께 담긴 건축물로써, 양국의 문화재 전문가, 장인, 기술자들이 함께 원형 복원에 참여해 복원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또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워싱턴 D.C.에 소재한 ‘19세기 외국공관’ 중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란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한미우호와 대한민국 역사의 이해’에 초점을 맞춰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