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D.C., located on Logan Circle northeast of the White House, was originally erected in 1877 as the home of American Civil War naval hero, politician, and diplomat Seth Ledyard Phelps (1824–1885). It was later purchased and became the Korean Legation in 1889. While not quite a full embassy, as a legation the building facilitated the active diplomatic endeavors of the Joseon Dynasty (1392–1897) and then the Korean Empire (1897–1910) for a period of 16 years. This ended when Imperial Japan deprived Korea of its diplomatic sovereignty through the Japan-Korea Treaty of 1905, also known as the Eulsa Treaty. Following the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of 1910, the Old Korean Legation building was purchased for a mere $5 b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immediately resold.
A century later, the Old Korean Legation building was returned to Korean hands in October of 2012 when it was purchased from a private owner b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the National Trust for Cultural Heritage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Old Korean Legation building is a deeply meaningful space that has witnessed major events in both Korean and American history. It was a cradle for the Korea-U.S. friendship born out of the dedicated diplomatic efforts of King Gojong (r. 1863–1907), and a symbol of the drive for independence among Korean residents in the United States who gathered there to reaffirm their determination to recover the sovereignty of their homeland.
식당은 공사관에 초대된 귀한 손님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밀접하게 교류하던 장소였습니다.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는데, 그때 이곳 식당에서 ‘식탁외교’의 현장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실제로 1889년 2월 조선공사관이 이 건물로 자리를 옮긴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대한 파티를 열게 되었는데, 이때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사교계에서 크게 주목받던 프랜시스 클리블랜드 Frances Cleveland) 미국 대통령 부인도 자녀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객당과 마찬가지로 현재 식당의 모습도 1893년 7월 뉴욕에서 발행 되었던 <데모레스츠 패밀리 매거진 (Demorest’s Family
Magazine)>에 보도된 ‘워싱턴의 외국 공사관 (The Foreign Legations at Washington)’이라는 기사에 함께 실린 사진작가 프랜시스 존스턴 (Frances B. Johnston)의 사진 속 모습을 참고해 재현하였습니다. 존스턴의 사진 속 식당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벽난로 장식과 거울의 프레임도 당시 모습과 똑같습니다.
백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 건물은 당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식탁 위에는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골동품 식기세트를 장식해 당시 ‘식탁외교’의 현장을 보다 생생하게 재현하였습니다. 조선의 병풍과 어우러진 이곳 식당의 풍경은 당시 이곳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19세기말 워싱턴DC에 개설된 32개의 외국 공사관 중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서, 우리나라가 서양국가에 설치한 최초의 공사관입니다.
건물은 1889년 2월부터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앗아갈 때까지 16년 9개월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공사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사관으로 사용될 당시 1층은 접견공간으로, 2층은 집무실 등 업무공간으로, 3층은 공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객당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객당은 공사관을 방문한 손님들을 맞는 접견장소였습니다. 현재 객당의 모습은 1893
년 7월 뉴욕에서 발행된 <데모레스츠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에 보도된 ‘워싱턴의 외국 공사관(The Foreign
Legations at Washington)’이라는 기사에 함께 실린 사진작가 프랜시스 B. 존스턴(Frances B. Johnston)의 사진 속 모습으로 재현되었습니다.
당시 기사에 묘사된 객당의 모습은 “이 조선공사관의 각 방들은 증기난방 시설, 벨 모양의 전등에서부터 형형색색의 비단천이 씌워진 소파들과 각종 봉제소품 등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이면서 고상한 최신 장식품들로 꾸며졌다. 예술가의 나라 조선답게 화사한 방들은 세련된 감각을 선보였다......창문이 많은 객당은 은은하게 대비되는 색감의 양단으로 멋지게 꾸며져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진 속 모습대로 객당의 샹들리에, 벽지, 카펫, 병풍은 새롭게 제작했으며, 가구는 당시 사용하였던 골동품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또한, 객당의 벽지는 1896년 이곳을 방문했던 한 신문기자가 공사관 방문기에 기술한 “vivid green” 문장을 참고해 녹색의 벽지를 부착해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재현된 객당은 19세기말 미국 속 또 다른 조선의 모습이었으며, 이곳에서 많은 현지인들과 외교관계를 넓혀가던 뜻 깊은 교류의 공간이었습니다.
정당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벽에 걸린 국왕과 세자의 사진입니다. 이곳에서 매월 두 차례에 걸쳐 공관원들이 ‘망궐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공사관에 근무하던 공관원들이 국왕과 세자가 계시는 궁궐을 향해 매월 두 차례씩, 그리고 국왕과 세자의 탄신일에 이곳에 모여 절을 올리며 신하로서 예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이는 현재 한국의 각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 가운데 ‘정당’ 혹은 ‘정청’의 기능과 동일한 용도였습니다. 사진이 부착된 벽면도 마침 서쪽 방향인데, 국왕이 계시는 한반도를 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19세기말 이곳을 촬영한 사진 가운데 ‘양복을 입은 남자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1895년경 박용규 공사의 모습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진은 당시 공사관에서 공관원들의 근무 모습을 담은 사진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사진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 속 남자는 앞서 공관원들의 사진 속 모습과는 다르게 양복을 갖춰 입고 서양식 헤어스타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1895년 조선의 ‘단발령’ 시행 이후 달라진 공관원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으로, 조선의 개화시책에 따라 이곳 공관원들의 의복과 외모도 변화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곳 정당의 현재 모습은 19세기 후반에 이곳을 촬영한 독립기념관 소장사진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외교 관련 기록물인 <주미내거안(駐美來去案)>을 근거로 재현되었습니다.
공사관 1층이 공사관을 찾는 손님을 맞이하던 공적인 공간이었다면, 공사관 2층은 주로 사무공간과 자료실 등 업무공간에 해당합니
다. 여기에 공사의 침실도 함께 있습니다. 그중 공사의 집무실은 공사가 업무를 보던 공간입니다. 1882년 5월, 조선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1888년 1월 워싱턴에 상주공관이 개설된 이래, 이곳 공사 집무실에서는 총 4명의 공사와 9명의 대리공사가 거쳐갔습니다. 이곳에서 미국 현지 외교업무와 관련된 각종 현안들이 최종 검토되고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공사 집무실의 모습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주미내거안(駐美來去案)> 속 ‘물품기’ 등을 근거로 조성되었습니다. 참고로 <주미내거안(駐美來去案)>은 이곳 공사관과 오늘날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조정의 외부 사이에 주고받은 각종 공문서 등을 묶어 놓은 기록물입니다. 이 기록에는 공사관 주요 공간의 구성과 명칭은 물론, 비품 목록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공사 집무실 또한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당시의 골동 가구들을 구입해 배치함으로써 지금의 집무실 모습을 재현할 수있었습니다.
공사 집무실과 문으로 연결된 이곳은 바로 공사의 침실입니다. 이곳의 용도가 공사의 개인숙소였던 만큼, 사적인 공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단지 공사 혼자서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아닙니다. 역대공사와 대리 공사들 중 일부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이곳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당시 역대 공사 부인들이 사용했던 화장대와 조선에서 가져왔던 2층 농 등을 함께 배치해 당시 모습을 재현하였습니다.
한편 이곳은 1890년 10월 이채연 대리공사와 부인 성주배씨 사이에 아들 이화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때 태어난 아들 이화손은 안타깝게도 생후 2개월 만에 병으로 목숨을 잃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처럼 공사 침실은 공사 부부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이자,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침실은 공사관 건물 2층의 동남쪽에 위치한 공간으로, 아침에 해가떠서 저녁에 해가 질 때까지 동쪽과 남쪽으로 향한 여러 창호들로 햇살이 고르게 들어와 채광도 매우 좋은 곳입니다. 그만큼 이곳은 매우 아늑한 생활공간이었습니다.
공사 침실과 연결된 욕실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당시 모습을 추정해 복원하였습니다. 줄을 매단 손잡이가 달린 수세식 변기와 욕조도 19세기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이 공간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매우 생경하고 놀라운 공간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생활하던 한옥의 구조와 크게 달랐던 점은 화장실이 집 안에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공간은 당시 크게 달랐던 조선과 미국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직접 실감할 수 있었던 곳이 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공관원들이 모여 함께 업무를 보던 사무실로, 실질적인 외교업무를 수행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세기말에 사용했던 골동가구 등을 배치하여 당시의 모습에 가깝도록 재현 하였습니다.
당시 공사관에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함께 근무했는데, 이들은 크게 ‘공관원’과 ‘수행원’으로 나뉘었습니다. 1888년 박정양 초대 공사 시절에는 총 10명의 인원이 근무했으며, 이 중 5명은 ‘공관원’, 나머지 5명은 ‘수행원’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행원 중 일부는 하인이었습니다. 이곳 사무실에 근무했던 인원은 바로 공관원들이었습니다. 현재는 관람공간을 고려하여 3명의 공관원이 근무하던 상황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1892년 워싱턴DC 시내 모습이 담긴 지도의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의 원본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당시 워싱턴 시내의 도로망과 주요 건물들의 특징을 살린 모습들을 영문 표기와 함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지도 속 백악관 동북쪽 1마일 지점에 “Korean Legation”이라고 표기된 것이 바로 주미공사관의 모습입니다. 특히 건물의 옥상에 펄럭이는 국기 등 그 특징을 잘 살려 그려넣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당시 워싱턴 시내에 소재했던 30여 개의 공사관 건물 중 불과 5개만을 그려넣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공사관이라는 사실은 당시 공사관 건물이 워싱턴 시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존재감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재는 각종 도서나 자료 등을 모아놓고 이용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곳 공사관의 서재는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882년 5월, 조선이 미국과 국교를 맺었지만, 당시 조선은 미국에 관한 정보나 자료가 크게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이곳 공사관에는 별도의 자료실 역할을 하는 서재를 마련하여, 미국의 역사, 지리, 문물과 제도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했던 것으로추정됩니다. 이는 여러 모로 조선과 크게 다른 미국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미국의 각 분야의 실정을 폭넓게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조선공사관이 미국 현지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교통과 통신, 교육, 군대 등과 같은 미국식 문물과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공관원들은 미국의 이러한 문물과 제도를 파악하기 위해 현지에서 직접 발로 뛰며, 각종 자료를 수집해 본국에 보고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실정에 맞춰 도입 가능한 문물과 제도를 면밀히 살폈던 것입니다. 이곳 서재는 바로 그런 미국 내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꼼꼼히 정리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이곳 3층의 현재 모습은 건물의 1~2층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3층은 공사관으로 사용될 당시 2층과 비슷한 형태로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직원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무렵, 이 건물이 화물운수노조의 사무실로 사용되면서 3층의 벽체가 모두 헐려, 지금처럼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변형되었습니다.
공사관 복원 과정에서 19세기 원래 모습대로 복원을 검토했으나, 당시에 대한 충분한 도면이나 자료가 충분치 않아 옛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공사관의 역사적 성격과 건물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실로 꾸며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곳 전시실에서는 초기 한미관계의 시작과 전개 과정은 물론, 공관원들의 각종 활동상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 복제 유물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 진열장에 전시된 것 가운데 1893년 발행된 <집조>는 오늘날 ‘여권’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또한 1888년 미국워싱턴 시내와 포토맥강 일대를 그린 <화차분별도>는 조선 사람이 서양 현지에서 직접 바라 본 풍경을 그린 그림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써, 증기기관차와 전봇대, 가로등, 고층빌딩 등이 묘사되었는데, 이를 통해 미국식 근대 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